고종이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전한 외교 선물···127년 만에 러시아 현지서 첫 공개

2023-02-08     배진우 기자
고종이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선물의 하나로 러시아에서 처음 공개되는 조선 후기의 걸작 나전칠기 ‘흑칠나전이층농’(각단 56×81.5×42.5㎝, 전체 높이 127.1㎝).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조선 고종 임금이 1896년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 축하 선물로 보낸 나전칠기, 오원 장승업의 그림 등이 러시아 모스크바 크렘린박물관에서 127년 만에 처음 공개된다.

8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따르면 모스크바 크렘린박물관 내 무기고박물관에서 ‘한국과 무기고, 마지막 황제 대관식 선물의 역사’를 주제로 한 특별전이 10일부터 열린다.

무기고박물관은 1508년 러시아 황실의 무기고로 세워졌으며 현재는 크렘린박물관이 무기·황실 보석 등을 소장하고 있는 공간이다.

특별전에는 고종이 민영환을 전권공사로 한 사절단을 통해 보낸 17점의 선물 중 크렘린박물관이 소장 중인 ‘흑칠나전이층농’, 장승업의 ‘고사인물도’ 2점, ‘백동향로’ 2점 등 총 5점이 선보인다.

고종은 선물을 보낼 당시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에 머물고 있었다(아관파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이듬해인 1896년 2월 아관파천을 한 것이다.

특별전 출품작들은 당시 사절단의 일원으로 민영환을 수행해 대관식에 참석한 윤치호의 일기 등을 통해 선물 목록 일부가 알려졌으나 실물이 공개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중에서도 ‘흑칠나전이층농’은 2020년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의 국외 소재 문화재 보존복원 지원으로 수장고에서 나와 빛을 볼 수 있었다.

고종의 특명으로 당대 가장 뛰어난 나전 장인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작품은 농 하단부에 십장생(十長生) 문양 나전을 부착해 니콜라이 2세의 무병장수를 기원했다.

1920년 일본에 실톱이 도입되며 자개를 실처럼 잘게 잘라 붙이는 ‘끊음질’ 나전 기법이 유행했는데, 이 작품은 일본보다 30년 앞서 조선 공예사의 정수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장승업의 작품 중 보기 드문 대작인 ‘노자출관도’( 비단에 채색, 174.3×65㎝).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조선의 마지막 천재 화가로 불리는 장승업(1843~1897)의 걸작 2점도 최초 공개된다.

이번에 공개되는 작품은 ‘고사인물도(故事人物畵·역사나 신화 속 인물과 관련된 일화를 그린 그림)’ 연작 4점 중 ‘노자출관도(老子出關圖)’와 ‘취태백도(醉太白圖)’ 2점이다.

장승업의 작품들은 높은 수준은 물론 보기 드문 대작이다. 특히 작품에는 낙관(서명) 앞에 ‘조선’(朝鮮)이라는 국호를 붙여 ‘외교적 선물’을 전제로 창작된 것으로 보인다.

조형미가 돋보이는 백동향로는 사각과 원형의 2점이다.

이밖에도 ‘진수영보(眞壽永寶·참다움과 장수, 영원한 보물)’를 새긴 ‘백동향로’ 2점도 선보인다.

땅을 상징하는 사각 향로에는 ‘향기로운 연기가 서리다’는 뜻의 ‘향연(香煙)’을, 하늘을 상징하는 원형에는 ‘참다움과 장수·영원한 보물’이란 뜻의 ‘진수영보(眞壽永寶)’란 글자를 새겨 축하 의미를 더했다.

고종은 1896년 아관파천 이후 니콜라이 2세와 두터운 친분 관계를 맺은 것으로 유명하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친서는 30건에 이를 정도다.

첫 친서 역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서 출발했다. 당시 충정공을 특사로 파견해 전한 이 편지에는 “짐은 폐하(니콜라이 2세)가 정의를 토대로 세계 열강제국이 짐의 나라에 대한 일본의 불법적 행위를 꾸짖고 나라의 독립을 침해하지 못하게 모든 조약규정 위반을 즉시 중지하도록 권고해 주길 바라고 바란다”는 내용이 담겼다. 

땅과 하늘을 상징하는 사각과 원형의 ‘백동향로’(왼쪽 26×16.5×21.7㎝, 오른쪽 23×17.5㎝).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