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피해보다 더 무서운 건 그 이후

2025-08-12     세종일보
아이클릭아트 

성희롱 실태조사에서 드러난 수치는 제도적 대응의 허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피해 경험자 중 12.3%가 2차 피해를 겪었고, 절반 이상은 아무런 해소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악의적 소문, 평판 훼손, 폭언·폭행 등 사건 이후에 발생하는 피해가 상당수 확인됐다. 이는 단순히 가해 행위에 대한 처벌만으로는 직장 내 성희롱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피해 이후의 대응이 제도의 성패를 가르는 핵심이기 때문이다.

조사 결과 피해자의 75.2%가 '참고 넘어갔다'고 답했다. 공식 절차를 밟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고, 그 이유로는 ‘문제를 제기해도 조직이 묵인할 것 같아서’, ‘관계 악화 우려’, ‘불이익 걱정’이 주로 꼽혔다. 고충창구 인지율은 90%가 넘었지만 실제 권유 경험은 8.9%에 그쳤다. 제도가 존재하고 절차가 마련돼 있어도, 이를 사용할 수 없는 분위기와 신뢰 부족이 피해자를 침묵으로 내몬 셈이다.

공식 신고 이후에도 '적절한 조치가 없었다'는 응답이 23%였고, 피해자 보호조치나 행위자 징계가 이뤄졌다는 응답은 각각 10%대에 머물렀다. 사건 처리 과정과 결과에 모두 불만족하는 응답이 30~40%를 차지했다. 이는 제도 운영의 실질적 신뢰를 확보하지 못하면, 피해자는 목소리를 내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성희롱 방지체계는 단순히 신고 창구를 마련하거나 규정을 개정하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피해 이후의 심리적·관계적 장벽을 낮추고, 2차 피해를 철저히 차단하며, 사건 처리 전 과정에서 피해자가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무엇보다 제도의 존재를 넘어 현장에서 체감할 수 있는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시급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형식적 확장이 아니라, 작동하는 제도를 만들기 위한 재정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