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미에서 꽃동네까지…교황이 남긴 충청권 순례의 유산
프란치스코 교황이 현지시간 21일 선종하며 생전 마지막 유언으로 로마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 지하, 장식 없는 단순한 무덤에 묻어달라고 밝힌 사실이 공개되었다. 교황청은 이번 유언이 2022년 6월 작성된 것이라며, 교황이 마지막 순간까지 검소함과 겸손의 삶을 실천했음을 확인시켰다고 전했다. 대부분의 전임 교황이 바티칸 성베드로 대성당에 안장됐던 것과 달리, 프란치스코 교황은 100여 년 만에 바티칸 밖에 안장되는 첫 교황으로 기록되며, 그가 사랑했던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에서 영면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그의 생전 여정을 되돌아보는 가운데, 2014년 한국 방문 당시 충청권에서 남긴 발자취가 다시금 조명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같은 해 8월 14일부터 18일까지 한국을 공식 방문하며 대전 월드컵경기장, 세종시 가톨릭대학교, 당진 솔뫼성지, 서산 해미읍성, 음성 꽃동네 등 충청권 내 다섯 곳을 찾았다. 이 방문은 종교 행사를 넘어선 문화적 전환점으로, 지역 역사 복원과 사회적 통합, 그리고 국제적 순례지로의 도약을 동시에 이끌어냈다.
2014년 8월 15일 성모승천대축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대전 월드컵경기장에서 약 5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미사를 집전했다. 이 미사는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의 일환으로 진행되었으며, 세월호 참사 이후 침체된 사회에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대전 월드컵경기장은 종교뿐 아니라 문화행사의 무대로서 기능이 확장되었으며, 관련 유물은 지역 박물관에 보존되고 있다.
같은 날 오후에는 세종시 전의면 대전가톨릭대학교에서 아시아 22개국에서 온 청년 6000여 명과의 오찬 간담회가 열렸다. 교황은 이 자리에서 청년들과의 직접 소통을 통해 종교적 연대와 문화적 다양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후 세종시는 국제행사 수용 역량을 인정받아 각종 국제회의, 문화행사, 종교행사 개최지로 부상했고, 도시 인프라와 교육기관의 국제적 위상도 높아졌다.
당일 저녁에는 충남 당진의 솔뫼성지를 방문해 김대건 신부 생가를 참배하고 청년대회 문화행사에 참석했다. 솔뫼성지는 한국 천주교 최초의 사제 탄생지로, 역사적 상징성이 짙은 장소다. 이후 증강현실(AR) 기반의 역사관이 조성되었고, 내포 천주교 순례길과 연계한 도보 성지순례가 활성화되었다.
2014년 8월 17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충남 서산 해미읍성을 찾아 폐막 미사를 주관했다. 해미읍성은 조선 후기 수천 명의 천주교 신자가 처형된 순교지로, 교황은 이곳에서 과거의 박해를 기리며 평화와 화합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후 해미읍성은 2020년 교황청으로부터 한국 최초의 국제순례지로 공식 선포되어 세계적 가톨릭 순례지로 자리매김했으며, 유네스코 등재를 위한 학술 조사와 문화재 복원 사업이 지속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2023년 기준 해미읍성 방문객은 87만7,646명을 기록해 충남 주요 관광지 중 상위권에 올랐으며, 교황 방문 전 연간 40만~50만 명 수준이던 방문객 수가 이후 최대 120만 명을 넘기기도 했다. 순례자센터, 문화교류시설 등 인프라 확충과 함께 각종 문화행사와 명절 세시풍속 체험이 더해지며 가족 단위 관광객 증가도 이어지고 있다.
8월 16일 방문한 음성 꽃동네는 장애인과 소외계층을 위한 복지 공동체로, 교황은 이곳에서 복지시설을 시찰하고 장애 아동들과 식사를 나누며 연대의 메시지를 전했다. 이후 꽃동네는 국제 복지모델로 주목받아 30개국 이상에서 복지모델로 벤치마킹되는 등 세계적 명성을 확보했고, 유엔 사회개발위원회에서 사례 발표가 이뤄지는 한편 국제 복지 네트워크와의 교류도 확대되었다. 지역 차원에서는 장애인 친화도시 조성 사업이 음성군을 중심으로 추진되었으며, 국내외 자원봉사자와 연구자, 복지 전문가들의 방문이 증가해 지역 경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해외 자매기관 설립과 국제 교류 프로그램 확대 등 실질적인 변화도 나타나고 있다.
충청권 순례지 전반에 걸쳐 관광객 증가와 지역 경제 파급효과도 두드러졌다. 2023년 충남 전체 관광객은 3,100만 명을 돌파하며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 대비 4% 증가했다. 해미읍성, 솔뫼성지 등 주요 순례지 방문객 수가 확대되며 지역 관광산업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순례지의 국제적 인지도 상승과 함께 역사·문화 자산 보존 및 활용 사업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교황의 충청권 방문은 각 지역이 지닌 종교적·역사적·문화적 자산을 재조명하고, 이를 국제적 수준으로 격상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2027년 서울에서 개최될 세계청년대회를 앞두고, 충청권의 순례지들은 다시금 전 세계 청년들과 소통할 플랫폼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들 성지는 교황 선종을 계기로 10년 전 남긴 흔적과 유산을 재조명하며, 유산 보존과 현대적 활용의 균형을 모색하는 지속 가능한 신앙·문화 공간으로의 전환을 꾀하고 있다. /이성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