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무기력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가장 조용하지만 뚜렷한 정서는 무기력이다.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극심한 좌절을 겪은 것도 아니다. 그저 일상 속에서 조용히 축적된 피로와 단념이 어느 순간 삶의 동력이 되지 못하고 사라진 것이다.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 현실, 성과로 환산되지 않는 감정, 인정받지 못하는 수고는 개인의 동기를 잠식시키기에 충분하다.
무기력은 심리학적으로는 ‘학습된 무기력’으로 설명된다. 반복되는 실패나 통제 불가능한 환경 속에서 사람은 점차 시도 자체를 포기하게 된다. 해도 안 된다는 경험이 쌓이면, 그다음엔 애쓰지 않게 된다. 이것은 단순한 의욕 저하가 아니라 심리적 에너지의 고갈이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멈추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해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확신 속에 멈추는 것이다. 사회는 이를 나약함으로 오해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오랜 시간 견뎌온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문제는 이 무기력이 특정한 개인의 상태가 아니라 세대 전체에 퍼진 정서라는 점이다. 특히 경쟁 사회에 일찍이 진입한 MZ세대는 무기력과 탈진을 동시에 경험하고 있다. 성과와 효율이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된 사회에서 이들은 ‘잘 살아가는 법’이 아니라 ‘잘 버티는 법’을 먼저 배웠다. 그렇게 달려온 끝에 돌아오는 보상은 불투명한 미래와 사회적 고립이다.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점점 줄어들고, 비교와 평가 속에서 자기 확신은 점점 약해진다. 자존감은 콘텐츠화된 타인의 성취에 무너지고, 성과는 플랫폼에 소비된 뒤 사라진다.
그러나 무기력을 개인의 문제로만 환원하는 인식은 위험하다. 지금 우리가 마주한 이 무기력은 시대의 구조가 만들어낸 결과이자, 사회가 방치해온 경고다. 무한경쟁을 정상으로 여긴 조직, 성과주의를 유일한 가치로 삼은 문화, 실패에 관대하지 않은 시스템은 사람을 동력 있는 주체가 아닌 반복 가능한 기능으로 만들었다. 정서적 탈진은 그 시스템이 낳은 필연적인 부산물이다.
이제는 방향을 바꿔야 한다. 동기의 회복은 쉼표 몇 개로 해결되지 않는다. 삶에 다시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 일에 감정이 남을 수 있는 구조, 실패해도 복원 가능한 사회적 기반이 필요하다. ‘게을러서가 아니라 지쳤기 때문’이라는 고백이 용납되는 사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이 공허한 위로가 되지 않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무기력은 개인의 짐이 아니라, 함께 풀어야 할 사회적 과제로 전환될 수 있다.
성과보다 지속 가능성을, 속도보다 회복을 먼저 말해야 한다. 무기력은 나약함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사회의 가장 솔직한 신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