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독립운동, 국민이 선정한 역사적 발자취
국민이 선정한 3월의 독립운동에는 조선의 자주 독립을 위한 다양한 투쟁이 포함된다. 1898년 개최된 만민공동회는 열강의 이권 침탈에 맞서 자주 독립과 자유 민권을 지키기 위한 민중 대회였다. 독립협회가 주도했지만 점차 민중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며 운동이 확산됐다. 그러나 고종이 독립협회를 불법화하고 개혁안을 무산시키면서 42일간 철야시위가 이어졌고, 결국 강제 해산되었다. 만민공동회는 민주주의 사상을 보급하고 민중 주도의 애국운동을 정립한 점에서 의의가 있다.
1910년 3월 26일,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혐의로 뤼순감옥에서 순국했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자신을 전쟁포로로 대우할 것을 주장하며 정연한 논리를 펼쳤고, 일본인 재판장과 검찰관들도 그의 태도에 탄복했다. 변호를 지원하려는 국내외의 움직임이 있었으나 일본 당국은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결국 사형이 선고됐고, 형이 집행되었다.
1911년 3월 북간도에서는 대종교단이 중광단을 조직했다. 초기에는 민족학교를 설립해 인재를 양성했으며, 1917년부터 본격적으로 무장투쟁을 준비했다. 이들은 북간도의 3·1운동을 주도했고, 1919년 5월 대한정의단으로 발전적으로 해체되었다.
1915년 3월, 경성고등교원양성소의 이우용이 주도한 조선산직장려계는 민족경제자립을 목표로 결성된 항일비밀결사조직이었다. 조직원들은 일본에 탈취당한 경제권을 되찾기 위해 각종 사업을 전개하고 민족 실력을 양성하려 했다. 그러나 활동이 본격화되기 전인 1917년, 일본 경찰에 의해 발각되어 해체되었다.
1917년 평양에서 조직된 조선국민회는 국내외 독립운동 단체와 협력하며 자치의 자유를 추구했다. 재미국민회와의 연계를 도모하고, 활동 범위를 간도까지 확장하며 회원을 모집했다. 또한, 회칙과 회원명부를 제작하지 않는 등 철저한 비밀 유지 원칙을 따랐다.
1919년 3월 10일, 변상태와 김관재는 마산으로 돌아가 독립 선언서와 『조선 독립 신문』을 전달하고 만세 시위를 모의했다. 추산정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이 사건은 지역 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같은 해 3월 13일, 북간도 용정에서는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대규모 독립선언식이 열렸다. 서전 벌에서 열린 이 행사에서 조선독립축하회라는 명목으로 독립이 선언되었고, 이후 조직적인 만세 시위가 이어졌다.
유림 측에서도 독립운동에 동참했다.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의병 출신 유림들은 파리 강화회의에 한국 독립을 호소하는 서한을 작성했다. 이들은 일본의 배신 행위와 한국주권 찬탈 과정을 폭로하며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1925년 3월 10일, 북만주 영안현에서는 신민부가 결성되었다. 공화주의와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한 이 조직은 중앙집행위원회를 중심으로 운영되었으며, 약 500명의 무장 대원을 편성해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같은 해 일본 도쿄에서는 재동경조선인단체협의회가 결성되었다. 이들은 조선총독부의 폭압 정치에 맞서며, 3·1기념투쟁과 관동진재조선인학살추도회를 주최하는 등 재일조선인의 민족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국민이 선정한 3월의 독립운동은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한 다양한 투쟁을 보여준다. 각 지역에서 전개된 만세운동과 독립단체 결성은 일제의 지배에 저항한 조선인의 강한 의지를 반영하며, 이들의 희생과 노력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승현 기자